발리에서 보낸 그의 일상은 아주 단조로웠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수영을 조금 하다가 낮잠을 자고, 한국에서부터 싸들고 온 만화책을 들춰 보다가 다시 낮잠을 자고, 그렇게 작정하고 게으르게 보낸 일상. 어쩌면 모든 것을 떠나보내고 난 뒤라 더 작정하고 마음을 놓았는지도 모른다. <힐러>가 끝난 후 지창욱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발리의 공항에도 그를 잠시라도 보기 위해 몇 시간이고 기꺼이 기다리는 많은 팬들이 모여 있었고, 공항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리조트 안에서도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며 말을 걸어왔다.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시청률이 대단히 높게 나온 게 아닌데도 사랑을 많이 받았죠. 그런데 이제 그 작품은 끝나버렸어요. 작품은 지나갔고, 저는 더 이상 힐러가 아니죠. 다만 현장에서의 즐거웠던 기억만 남았어요. 작가님, 감독님과 소통하는 것도 즐거웠고 현장 스태프들과도 모두 동네 형, 누나, 동생처럼 재미있게 지냈어요. 그게 전부예요. 달라진 건 없어요. 단지 예전보다 이런저런 제안이 많아진 정도? 예전에는 작품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들어오면 일단 하고 보거나 두 작품 중에 하나를 고르는 식이었다면, 이제는 여러 작품 가운데 고를 수 있게 된 거죠.” 촬영 현장에서 그는 유쾌한 청년이다. 일부러 많이 웃고 장난도 치고 농담도 건넨다. 그런데 사실 그건 노력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현장은 늘 바쁘잖아요. 그런 와중에 연기만 하려다 보면 더 지치더라고요. 그래서 애써 더 웃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런 제 모습이 실제 제 성격이 되어버렸어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격의 없이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오랫동안 함께한 스태프들은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함께 나누기도 하고, 작품이 끝나면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느라 일주일에 5일은 취해 있을 만큼 웃고 떠들며 즐기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법이 없다. 보충수업을 막아보려고 전기 콘센트에 젓가락을 꽂아 정전을 시켰다는 학창 시절 무용담 속 지창욱을,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의 모습에서는 도무지 떠올릴 수가 없다. 그의 오랜 친구이자 지금은 함께 일하는 매니저는 10대의 지창욱을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놈’이라고 말했다. 그랬던 놈이 울며불며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고 그렇게 진짜 배우가 되었다. “신인 때는 너무 힘들었어요. 배우 생활이라는 게 연기만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연예계라는 곳에 들어와서 선배들 붙잡고 많이 울기도 했어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서 더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지금은 많이 적응한 것 같아요. 예전에는 인터뷰를 할 때면 단답형으로 대답하곤 했어요. ‘좋아하는 게 뭐예요?, 물으면 ‘축구요’ 이런 식이었죠. 그때는 이상하게 제 입으로 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어색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이제는 오히려 한 작품을 끝내고 인터뷰를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면서 제가 연기한 캐릭터를 잘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죠. 연기라는 내 일을 위해 감수해야 할 부분도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