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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요즘 젊은 작가들은 문체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저는 문체를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다. 저는 장인적 기법이 없으면 목표를 향해 갈 수 없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차이가 크다.
한국어 사유는 조사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은·는·이·가’ 등 이걸 뗐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산다.
그 모호함 속에 우리 모국어의 힘이 있다.
‘비가 내린다 와 ‘비는 내린다’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이걸 증명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을 문장마다 하나 씩 따져 쓰려면 진이 빠지는 것인데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어 갈 수 없다.
법전 읽기 좋아하는 데 우리 순수한 한국어는 조사와 종결어미만 있다.
한문으로 바꿀 수 없다.
한자는 고구려에 소수림왕 때 들어온 글자로 우리 글자라고 해도 된다.
한자를 모르면 법전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 개념을 모른다.
소설에 한자어를 도입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모국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기사에서 발췌
다만 요즘 젊은 작가들은 문체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 저는 문체를 매우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다. 저는 장인적 기법이 없으면 목표를 향해 갈 수 없다. 한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조사를 읽는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차이가 크다.
한국어 사유는 조사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은·는·이·가’ 등 이걸 뗐다 붙였다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산다.
그 모호함 속에 우리 모국어의 힘이 있다.
‘비가 내린다 와 ‘비는 내린다’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이걸 증명할 수는 없다.
이런 것들을 문장마다 하나 씩 따져 쓰려면 진이 빠지는 것인데 그런 노력 없이는 문체를 만들어 갈 수 없다.
법전 읽기 좋아하는 데 우리 순수한 한국어는 조사와 종결어미만 있다.
한문으로 바꿀 수 없다.
한자는 고구려에 소수림왕 때 들어온 글자로 우리 글자라고 해도 된다.
한자를 모르면 법전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그 개념을 모른다.
소설에 한자어를 도입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모국어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다.”
--다음기사에서 발췌